위도 19°41'N, 경도 98°50'W, 멕시코시티에서 북동쪽으로 4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테오티우아칸 유적이 해발 2,300미터의 멕시코 계곡 평탄 지대에 자리하고 있다. 서기 150년에서 550년 사이 전성기에는 도시 인구가 12만 5천 명에서 20만 명 사이였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주거 구역의 범위가 아직도 지도화되고 있는 중이어서 추정치의 편차가 크다. 정확한 수치가 어떻든, 테오티우아칸은 당시 세계에서 여섯 손가락 혹은 일곱 손가락 안에 드는 대도시였으며, 로마·알렉산드리아·뤄양과 같은 반열에 있었다. 이곳은 명실상부한 대도시였다.
"테오티우아칸"이라는 이름은 건설자들이 스스로 부른 이름이 아니다. 이는 나우아틀어 단어로, 도시가 버려진 지 약 700년 후에 멕시코 계곡에 도착한 아스테카인들이 붙인 것이다. 이 나우아틀어의 정확한 의미는 불확실한데, "신들이 창조된 곳", "인간이 신이 된 곳", "신들의 도시" 등으로 번역되어 왔다. 아스테카인들은 이 유적을 이미 폐허 상태로 발견했으며, 주요 구조물은 온전했지만 인구는 수 세기 전에 사라진 뒤였다. 그들의 우주론은 이 버려진 도시를 편입시켰다. 그들은 이곳이 다섯 번째 태양, 즉 현재의 세계가 창조된 곳이며, 신들이 모여 그중 하나가 스스로를 희생하여 태양이 된 곳이라고 믿었다. 그들이 도착하기 전부터 이곳은 신성한 폐허였다.
"아스테카인들은 이곳을 신들이 태어난 곳이라 불렀다. 그러나 도시 자신의 이름은 죽은 자의 거리를 걸었던 모든 언어 속에서 여전히 공란으로 남아 있다."
— 아스테카 전승 및 현대 테오티우아칸 연구의 의역
테오티우아칸을 실제로 건설한 사람들은 해독된 문자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들은 프레스코화, 도자기 인형, 조각된 돌, 흑요석 칼날 등 풍부한 시각 자료를 대량으로 남겼지만, 해독된 문자 체계로 쓰인 지속적인 서사 기록으로 판독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는 이 정도 규모의 도시로서는 이례적인 일이다. 마야, 몬테 알반의 사포텍인, 그리고 후대의 아스테카인들은 모두 부분적으로 또는 완전히 해독된 상형 문자 체계로 문자 기록을 남겼다. 테오티우아칸인들은, 만약 문자를 가지고 있었다면, 아직 그것을 내놓지 않고 있다.
격자 구조와 그 정렬
테오티우아칸 죽은 자의 거리의 터널 | Peachseltzer (CC BY-SA 4.0)
!테오티우아칸 — 멕시코")
테오티우아칸 죽은 자의 거리의 터널 | Peachseltzer (CC BY-SA 4.0)
도시는 특정 천문학적 방위를 향해 정렬된 직교 격자 위에 배치되었다. 주축 — 북쪽의 달의 피라미드에서 남쪽의 시우다델라(성채)까지 약 2.4킬로미터에 걸쳐 이어지는 행렬용 도로인 죽은 자의 거리 — 은 진북에서 동쪽으로 15.28도 기울어져 있다. 이는 정북이 아니며, 임의적인 것도 아니다.
테오티우아칸 죽은 자의 거리의 재규어 벽화 | Peachseltzer (CC BY-SA 4.0)
이 각도는 의도적인 천문학적 정렬이다. 테오티우아칸의 위도(북위 19.7도)에서 태양은 일 년에 두 번 머리 바로 위를 통과한다. 첫 번째 천정 통과일은 4월 29일이다. 그날, 많은 메소아메리카 전통에서 시간과 창조의 표지로 알려진 별무리인 플레이아데스 성단이 동트기 직전에 나선 상승(태양 뒤에서 나타남)하는데, 그 방위각이 거리의 방향과 일치한다. 4월 29일은 메소아메리카의 365일 태양력에서 중요한 날짜로, 농경 주기와 연계된 한 해의 구분을 표시했다. 거리는 달력으로서 건설된 것이다.
이러한 정밀성은 여러 세대에 걸친 정교한 천문 관측과 수학적 역량을 함의한다. 이는 건설의 우연이 아니었다.
태양의 피라미드
죽은 자의 거리 동쪽에 접해 있는 태양의 피라미드는 부피 기준으로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피라미드 구조물이다(기자의 대피라미드와 촐룰라의 대피라미드에 이어). 기단에서 상부 플랫폼까지 65미터 높이로 솟아 있다. 기단은 225미터 x 222미터로, 기자의 대피라미드 기단(230미터 x 230미터)과 거의 동일하다는 점이 반복적으로 지적되어 왔다. 이러한 수렴은 우연의 일치이다. 이집트인과 테오티우아칸인 사이에는 접촉이 없었다.
태양의 피라미드 아래에는 1971년 고고학자 르네 미용이 발견한 자연 동굴 체계가 있는데, 이는 인위적으로 확장되고 다듬어져 네 개의 엽(葉)이 클로버 모양으로 배열된 방으로 만들어졌다. 동굴은 피라미드의 중심축 아래로 약 100미터에 걸쳐 뻗어 있다. 메소아메리카 우주론에서 동굴은 지하세계의 입구이자 인간 창조의 장소를 상징했다. 이 동굴 위에 피라미드를 의도적으로 건설한 것은 기념물의 수직축을 아래 지형의 신성한 지점과 정렬시키려는 의도적 선택을 거의 확실하게 반영한다.
케찰코아틀 신전 아래의 터널
2003년, 폭우로 인해 케찰코아틀 신전 앞에 싱크홀이 생겼다. 이 신전은 대로 남쪽 끝에 위치한 시우다델라 복합단지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정교한 피라미드이다. 그 아래에는 봉인된 터널의 입구가 있었다. 고고학자 세르히오 고메스는 원격 조종 로봇으로 발굴을 시작했고, 이후 14년에 걸쳐 점차 완전한 팀을 구성하여 발굴을 진행했다.
터널은 신전 아래 입구에서 103미터까지 이어진다. 벽과 바닥은 황철석과 운모 입자로 덮여 있어 빛을 반사하여 반짝이는 효과를 만들어낸다. 고메스는 이를 "별의 강"이라고 묘사했다. 터널 내부 유기물의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 터널은 서기 250년경에 봉인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내부에서는 목제 유물, 녹색 암석 조각상, 옥 구슬, 대형 흑요석 칼날, (의례용 구기 경기에 사용된) 고무공, 멕시코만과 태평양 연안에서 가져온 조개껍데기, 재규어와 푸마의 뼈, 그리고 — 리산에서와 마찬가지로 — 바닥 퇴적물에서 수은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터널 끝부분에 있는 세 개의 봉인된 방은 부분적으로만 발굴되었으며, 각 방에는 공물로 보이는 유물과 일부 방에서는 인골이 확인되었다.
터널의 기능은 장례용이 아니라 의례용이었다. 일차 매장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는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주요 신전 아래에 조성된 인공 성소로 보이며, 도시 건국과 관련된 의례에 사용된 후 봉인된 것으로 추정된다.
누가 건설했고 왜 떠났는가
흑요석은 테오티우아칸의 인구를 이해하는 핵심이다. 이 도시는 메소아메리카에서 알려진 최대 규모의 흑요석 산지를 통제했으며, 주변 계곡의 오툼바와 파추카에 위치해 있었다. 흑요석 — 강철보다 단단하고 어떤 금속보다도 더 예리한 날을 만들 수 있는 화산 유리 — 은 콜럼버스 이전 메소아메리카의 전략적 자원이었다. 테오티우아칸의 권력은 부분적으로 상업적 성격을 띠었다. 이곳은 제조 중심지이자 교역의 허브였으며, 그 영향력은 남동쪽으로 1,200킬로미터 떨어진 마야 도시들에까지 미쳤다.
그러나 토기 증거는 인구가 다민족적이었음을 보여준다. 1980년대에 발굴된 도시 서부의 독특한 주거 구역에서는 몬테 알반과 동일한 전통인 오악사카 사포텍 전통의 특징적인 토기 유형이 출토되었다. 다른 주거 구역에서는 멕시코만 연안과 멕시코 고원 지대의 토기가 발견된다. 테오티우아칸은 단일 민족 국가가 아니라, 상업을 기반으로 한 국제적 도시였다.
서기 550년경, 죽은 자의 길을 따라 늘어선 주요 공공건물들—신전들과 엘리트 주거용 궁전들—이 불에 탔다. 방화는 의도적이고 표적화된 것이었다. 무작위적 파괴가 아니라 행정 중심지, 즉 지배계급의 건물들에 대한 체계적인 파괴였다. 주거 구역은 불타지 않았다. 증거와 가장 부합하는 해석은 엘리트에 대한 내부 봉기, 즉 정복이 아닌 혁명이다. 도시는 즉시 버려지지 않았으며, 사람들은 수십 년간 주거 구역에서 계속 살았다. 그러나 도시를 조직해 온 제도들은—그것이 무엇이었든—파괴되었다.
그들이 남긴 도시는 메소아메리카 고고학에서 가장 큰 미해결 질문이다. 우리는 이 도시를 건설한 사람들의 이름도, 태양의 피라미드가 어느 신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는지도, 시장에서 쓰인 언어도, 지배자들이 결국 전복된 이유도 알지 못한다. 우리는 도시 격자의 천문학적 정밀성, 수입품의 화학적 특징, 가장 오래된 신전 아래에서 빛나는 터널을 알고 있다. 도시는 자신의 이름을 단 한 번도 말해 주지 않으면서도 엄청난 양의 정보를 우리에게 전해 준다.




